[KO] 구글 북스에서 읽은 '채식주의자' (2007, 한 강)

얼마 전 작가 한강 씨가 이번 해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됐다는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. 그 소식을 듣자 나의 개인적인 옛날 기억이 떠올랐다. 어림짐작 스무 해도 더 전일 것이다.것이다. 한국의 노시인 그 누군가를 의도적으로 노벨상을 받게 하고 하고야 말겠다는 국가적 야심을 신문 기사에서 읽은 적이 있다. 그 땐 장군이 대통령이 되는 시절이었고 올림픽을 유치한 것을 나라 발전의 상장처럼 자랑스러웠던 무렵이었다. 내가 다닌 초등학교의 교훈은 ‘하면 된다’였고 컴플렉스에 찌들어 살던 우리는 모름지기 좀 살게 된 국가라면 적어도 노벨상 하나 정도는 받아주어야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다. 하지만 그 영예는 시간이 흘러 국가적 야심과 무관한 한 강 작가에게 돌아왔다.


'채식주의자' 개정판 


뉴스를 들은 후 작가의 작품을 읽기로 작정했다. 작가의 명성은 알고 있었지만 부끄럽게도 한 권도 읽은 적이 없다니… 작은 반성과 함께 스마트폰의 앱, 구글 플레이 북스 Google Play Books에 들어가 ‘채식주의자’를 선택하여 구매 전에 무료로 제공되는 글부터 읽기 시작했다. 


열 다섯 쪽 남짓을 단숨에 읽어내리자 마자 구글 북스는 구매의사를 물어왔다. 가격은 8유로 2센트.  시내의 서점에 달려가서 종이 책을 살까 하는 상상을 잠깐 했으나 이 곳 책가게에는 내 나라 말로 된 책이 아예 없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. 구글 북스에서 주선한 네 시간 가량의 모국어 여행을 나는 쾌히 승낙하고 페이팔PayPal로 5초도 안 걸려 소설값을 내고 소설책을 내려받았다. 



이 책을 나는 단 번에 읽어내렸다. 앉은 자리에서 단 번에 읽을 수 있는 이야기라니! 이 책이 나온 것이 2007년이니 햇수로 17년이나 되었지만, 작품의 완성도, 선명한 주제 의식과 독창적인 구성으로 인해 여전히 싱싱하게 읽힌다.


작품은 세 편의 이야기가 나뉜 듯 하지만 한 데 모여 하나의 소설을 이루고 있다. 이를 위해 작가는 여러가지 장치와 복선을 작품 전체에 공들여 깔아두었다. 긴 이야기 한 개 대신 셋으로 구성한 것은 참으로 재치있는 발상이다. 왜냐하면 셋으로 되어있는 것은 태생적으로 긴장을 유발하기 때문이다. 


나는 이 책에 빗대어 볼 수 있는 세 조각으로 나뉜 예를 생각해보았다. 일단 층층이 쌓아올린 케익이 있다. 그런데 대부분 아랫 쪽 케익이 제일 크고 무겁고 윗 쪽으로 갈수록 작고 가볍다. 그런데 이 이야기의 전개는 단계를 지나면서 밀도가 높아진다. 맞지 않는다. 


그럼 양파는 어떨까. 양파의 메마른 꺼풀 밑에 매끄러운 표면을 한 둥그런 덩어리가 들어있다. 그 살갗 한 겹 밑엔 더 작고 옹골찬 알맹이가 나온다. 양파의 가운데에 움이 자리한다. 양파의 움은 조개 속 진주 같이 돋보이거나 번데기를 벗고 나온 성충처럼 준비를 끝마친 존재가 아니다. 기회가 되면 싹이 터서 저와 같은 양파로 부풀어오를 수 있는 가능성이나 꿈이라고 할 수 있겠다.  


그렇다, 이 이야기는 양파처럼 생겼다. 작품의 중심 인물 영혜는 양파처럼 자신을 벗어 나간다. 그녀는 그러면서 가벼워지고 정직해진다. 그녀가 허물같은 첫 꺼풀을 벗는 첫 번째 이야기는 혼인관계에 있는 그녀의 남편이 말하고, 그녀가 다른 껍질을 벗는 두 번 째 이야기는 그녀의 형부가 서술하고 있으며, 남은 것 없이 움으로 치닫는 마지막 이야기는 동기간인 그녀의 언니가 기술하고 있다. 남편, 형부, 언니로 이어지는 각 화자자와 주인공 사이는 그러면서 점차 밀접해진다. 이 세 사람은 관찰자가 아니며 그 자신이 등장하는 각 이야기의 주인공이다. 그들은 오직 자신의 관념을 통해 영혜를 접한다. 그리고 그녀에게 자신의 이익과 욕망, 고뇌를 한결같이 투사한다. 그러므로 세 이야기는 다른 듯 보이나 본질적으로 같다. 작가는 담담하고 치밀하게 세 개의 이야기를 구성한다. 


우리는 살면서 이런 저런 인연을 그물처럼 맺는다. 내게 별 영향이 없을 것 같았던 작은 균열은 그물이 죽 찢어지듯 우리의 삶에 크고 작은 상처와 흉터를 남긴다. 이 글에서 나무가 되고 팠던 영혜가 정말로 환자자인가 여부는 다음으로 미룬다. 다만, 사람이나 자연을 불문하고 누구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조용하고 정직하게 살아있는 것으로 나무만한 것이 어디 있으랴.  그 자신에게 정직하려 했던 젊은 여자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을 목격하며 같은 시대를 사는 독자로서 씁쓸하다. 영혜같은 이가 생명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곳은 어디인지 우리는 되짚어 물어야 한다.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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